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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12-19 18:07
충격!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37년간의 철권통치 시대를 유지한 그는 누구인가?
[뉴스브릿지=최정복 기자] 12월17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심장쇼크사 로 사망하여 화제이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장남으로 실제 출생연도에 대한 이견이 있었는데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1974년부터 주민들에게 그의 출생연도를 1941년으로 알렸다가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 때부터 1942년으로 선전 하였으며 구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고, 1942년 2월16일 중국과 북한의 경계지역인 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37년간 철권통치를 하며 김일성의 왕자의 자리에 오른 김정일이지만 유년시절에는 많은 일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이 평양으로 입성한 지 2개월여 지난 1945년 11월 생모와 그의 항일빨치산 동료와 함께 소련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 조국 땅에 첫 발걸음을 내딛었지만, 남동생 익사한 데 이어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 6·25전쟁으로 중국으로 피난살이를 가야했다.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한 유년시절은 계모와 이복형제에 대한 반감에 이어 후계자를 둘러싸고 계모 및 이복형제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는 성격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었으며 젊은 시절 구소련 방문 때 소련 공산당 관계자가 모스크바 종합대학 입학을 권유하자 "평양에도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훌륭한 대학이 있어요. 나는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할 겁니다."라고 대답 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삼석인민학교, 평양제4인민학교 1950년 9월에서 1960년까지 평양 만경대 혁명학원과 평양 남산고등중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959년에는 구(舊)동독항공군관학교를 유학했다가 1964년 김일성대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한 해인 1964년 6월에서 1974년 2월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과장, 부부장, 부장 등을 역임 하면서 1973년부터 1974년 사이에 아버지 김일성의 뒤를 이어 북한의 차기 최고 권력자로 자리 잡았으며 1980년 10월부터 그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회 서기를 맡았고, 1982년에서 1998년까지 조선최고인민회의 대표에 선출되었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는 ‘친애하는 지도자’로 호칭됨으로써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굳히면서 북한사회에 대l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 들어 김정일은 무력에 대한 지휘통솔권을 지닌 국방위원회를 장악하게 되는데, 1990년 5월에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에 오른 후, 1993년 4월에 마침내 국방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73년 김정일이 권력이양을 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김정일이 권력 장악을 위해 가장 몰두한 것은 최고의 그의 정적인 친인척 제거이다.
그가 가장 먼저 진행 한 것은 1970년대부터 자신의 경쟁자이자 잠재적 후계자였던 삼촌 김영주를 실각시키는 것이었으며 1990년대 이후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행사 석상에서 김영주는 보이지 않게 되는데, 김영주는 그의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 김영일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이 주변에서 후계 논의를 제기할 당시 “10년은 더 할 수 있다”며 후계자 낙점에 소극적이었다고 했으나 김일성 주석의 부인 김성애가 치맛바람을 일으키자 오진우 등 빨치산 파들이 반발해 김정일 위원장이 후계자로 일찍 결정됐다 는 시각도 있다.











김정일의 집권 이후 계모 김성애 역시 공식석상에서 제외되었고, 1975년부터 이들과 조금이라도 연결된 사람들을 전부 추방했으며, 이복동생으로 알려진 김평일은 권력견제로 폴란드대사로 근무하면서 20년 넘게 북한 땅을 밟지 못하고 있으며 김평일의 친동생 김영일은 2000년 5월 독일에서 간암으로 병사했고 김평일의 친누나 김경진은 남편인 김광섭 오스트리아대사를 따라 유럽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며 2001년에는 김일성 주석과 주석궁 안마사의 사생아이자 이복동생인 김현은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등 북한 내에서는 추종세력을 형성 할 수 없도록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다.





김정일은 김일성 주석 사망이후 1995년부터 북한은 유례없는 기근으로 수백만 명의 아사자를 냈는데, 이 시기를 북한은 '고난의 행군'으로 부른다. 뿐만 아니라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김정일은 수십만 명을 수용한 정치범 수용소를 유지 했으며 먹을거리를 찾고자 중국을 떠도는 탈북자를 북한으로 데려와 구타, 고문을 일삼아 국제사회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외부에서 경제적인 제제와 내부의 심각한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수시로 도발과 외교전을 병행 했으며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2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지만 있다. 하지만 1999년 , 2002년 연평해전과, 2010년 천안함 폭파, 연평도 포격 등을 일으키며 국제사회의 많은 비난을 사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는 두 번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을 일으켜 UN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드라마 같은 그의 삶도, 영원할 것 같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철권통치도 12월17일, 오전 8시 30분 열차에서심근경색으로 마감하였다. 그의 나이 만69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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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복 기자 newsbridge@newsbridge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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